리뷰, 작가/작품론, 기고. etc 외롭고 웃긴 시인, 프란시스 알리스 2012/01/15 15:02 by 찰리

외롭고 웃긴 시인, Francis Alys



영상, 퍼포먼스, 회화, 설치.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프란시스 알리스의 전시가 뉴욕 현대미술관 특별관(5월 8일-8월 1일)과 모마 PS1(5월 4일-9월 12일)에서 열렸다. 사실 PS1의 PS는 건물의 이전 용도였던 국립초등학교(Public School)의 약자이지만, 경우에 따라 편지 말미에 곁들이는 추신(postscript)이라는 뜻이 더 그럴듯하게 들리곤 한다. 이번처럼, 한 작가의 전시가 모마와 PS1에 걸쳐 동시에 열린 경우가 그렇다. 

1959년 벨기에에서 태어나 1980년대 중반부터 멕시코에 터를 잡고 활동하는 알리스와 뉴욕 맨하탄의 심장인 미드타운에 위치한 모마와의 관계는 2002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모마는 대대적인 리모델링 공사를 위해 소장품을 맨하탄에서 퀸즈로 일시적으로 옮겨야 했다. 탁월한 연출자인 알리스는 이 단순 창고이동을 거대한 도시축제로 탈바꿈시킨다. 보험과 보존 문제로 실제작품을 사용하는 덴 실패했지만, 피카소, 뒤샹, 자코메티 같은 현대미술 대표작가의 작품모형으로 제의적 행진을 흉내 낸 퍼포먼스를 선보인 것. 심지어 현대미술의 아이콘으로 선정된 키키 스미스는 직접 참여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스타작가 양성 시스템의 수혜자라는 부정적인 시각이 기저에 깔려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작품과 작가를 제단에 떠받들고 이동하며, 관현악단은 연신 흥겨운 퍼레이드 음악을 연주하고, 수백 명의 자원봉사자가 화려한 깃발을 높이 쳐 든 <모던 행진(The Modern Procession)> 영상은 준비과정 드로잉과 함께 PS1에서 상영됐다.  

이렇게 알리스의 프로젝트는 다소 과한 느낌이다. 가끔은 엉뚱하리만치 사소하기하도 하다. 그래서 실소와 호기심을 동시에 자아내며,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모마 6층의 특별전시장 입구엔 한 점의 영상작품과 다수의 핸드메이드 장난감 자동차가 진열돼 있었다. <컬렉터(The Collector)>(1990-92)와 <방식의 모순(Paradox of Praxis)>(1997)이 그 주인공. "때론 뭔가를 하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는 부제가 달린 영상 작품 <방식의 모순>에서 작가는 기내용 트렁크만한 얼음덩이를 밀면서 거리를 다닌다. 기괴한 산책은 얼음이 조약돌만큼 작아질 때까지 무려 9시간이나 계속된다. 이 고행은 작가가 살고 있는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노력과 결과물 사이의 거대한 불균형'에 대한 패러디이다. 비생산적인 고행이 생존을 위한 일상인 그 지역 사람들을 암시하는 퍼포먼스는 90년대 이후 작가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를 반영한다. "최대의 노력으로 최소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방법연구 말이다. 

<컬렉터> 시리즈의 이면도 흥미롭다. 개의 모양을 본 뜬 허술한 외형의 조형물 내부엔 사실 자석이 장착돼 있다. 작가가 애완동물과 산책하듯 이 굴러가는 장난감을 끌고 산책을 하면 거리의 온갖 고철, 특히 철로 된 음료수 뚜껑들이 달라붙게 된다. 자유분방하게 달라붙은 고철조각은 장난감 하나하나에게 새로운 장식이 되면서 '자동발생적' 작품 만들기에 공모한다. 상황주의자식으로 말하자면 '표류(derive)', 보들레르식으로 말하자면 '산책자(flaneur)'로 대표되는 '걷기'가 이 작품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걷기는 작가의 여러 작품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데, 심지어 1992년에 발표한 텍스트 형식의 작품은 모든 문장이 "내가 걷는 한, 나는 ()하지 않는다"라는 식의 문장을 총 26번 동안 강박적으로 반복한 것이다. "내가 걷는 한, 나는 선택하지/담배피지/잃지/만들지.... 않는다"라는 식의 현재진행형 문장 나열은 "내가 걷는 한, 나는 반복하지/기억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미래형의 두 문장으로 끝난다. 

작가는 걷기 행위를 사회 저항이자 작업의 영감을 얻기 위한 시적인 훈련으로 이해한다. 플라스틱 병의 행적을 참을성 있게 쫓은 영상 작업 <만약 당신이 전형적인 관객이라면, 당신이 정말로 하고 있는 것은 사건이 발생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1996)와 그림을 들고 온종일 걷기만 한 <그림 걷기(Walking a Painting)>(2002), 1985년의 대지진으로 깨진 채 보수가 되지 않고 있는 유리창을 발견할 때마다 베개를 끼워 넣은 <베개 놓기(Placing Pillows)>(1990) 등이 산책자로서의 작가를 발견할 수 있는 다른 작품들이다. 

한편, 걷기의 배경이 되는 멕시코는 사회학자 로저 발트라(Roger Bartra)의 말을 빌면 "공식 정치 구조의 후진성으로 얼어붙은, 파산을 겨우 면한 채 유지되면서 불확실한 고통을 겪는 빈곤하고 비효율적인 경제" 체제를 가진 나라다. 알리스는 아웃사이더 목격자로서, 즉 여행자의 시선으로 이 도시를 바라본다. 일용직 고용을 기다리며 줄을 선 전기공, 배관공 등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자필로 여행자라고 쓴 플래카드를 내놓는 뻔뻔함을 보여준 <여행자(Tourista)>(1994)는 이방인이었기에 가능한 작업이었다. 레저와 노동. 유러피안과 멕시칸.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 단 한 컷의 사진 속엔 놀라우리만치 많은 사회구조의 단면들이 숨겨져 있다. 

때문에, 이 대대적인 회고전 <속임수의 이야기(A Story of Deception)>를 런던 테이트 모던에서 기획한 큐레이터 마크 갓프레이(Mark Godfrey)는 알리스의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로 시학과 정치학을 든다. 시학인 포에틱스(Poetics)와 정치학인 폴리틱스(Politics)는 전혀 다른 학문이다. 알리스는 이 다름을 유머라는 바늘과 스토리라는 실로 촘촘하게 꿰매어 제시한다. 이름 하여, 시적인 정치학. 허나, 그의 '공들인 헛짓'은 시처럼 심각하지도, 정치처럼 위험하지도 않다. 다만 우화처럼 유쾌하거나, 동화처럼 천진하다. <토네이도>를(2000-2010) 향해 뛰어드는 작가의 모습은 소설 속 돈키호테의 모습 그대로다. 키 크면 싱겁다고 했던가. 멕시코에선 본인의 키가 너무 크다고 말하는 멀대 작가는 그렇게 싱겁고, 우습다. 그리고, 효율성을 알아버린 이방인으로서 비효율적인 사회 속, 멕시코 국경을 오르고 떨어지는 비틀의 운전석에서(<리허설1>), 한없이 외롭다. 

PS. 낡은 폭스바겐 비틀은 작품에 종종 등장하는 알리스의 자가용이다. 


-퍼블릭 아트 8월호 기고, 교정교열본은 여기서. (http://www.artinpost.co.kr/bbs/view.php?id=world&page=3&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305)

아래 이미지는 도록을 찍은 이미지들. 컬리티가 떨어지지만 작품 이해를 돕고저..^^






덧글

  • 윤디 2011/09/13 03:24 # 삭제 답글

    베를린 구겐하임에서 오늘 이 분이랑 몇 몇분 전시하는거 보고 와서는 이것저것 찾아보다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글 보니 막연하게 느껴지던 어떤것들이 선명해 지는게 작품 이해하는데 도움이 많이 되네요.
    계속 뉴욕 소식 기대하겠습니다.
  • 찰리 2011/09/13 14:09 # 답글

    격려 감사합니다. 베를린 구겐하임 가보고 싶어요. ^^ 그곳에 계시나요? 소설네트워크 사용하시는 곳 있으시면 알려주시겠어요? 트위터든, 블로그든요.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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